믿는 자의 모델이 되는 교회(2) -나의 만남이 새롭게(행13:1-3)

지난 주에 “나의 다락방부터 새롭게”라는 말씀을 가지고 한 해를 출발했다. 두가지 의미가 있었다.

첫째는 마가 다락방에서 시작된 응답과 축복에 대해 집중해 보라는 것이다. 복음 가진 자가 누린 성령의 축복이다. 둘째는 그 축복을 내 것으로 체험하기 위해서 정말로 회복할 것이 있다. 기도 회복이다.

우리가 영적 사실을 알고 기도할 때만 나를 갈등하게하고, 실패하게 하는 잘못된 각인, 뿌리, 습관이 바뀐다.

우리는 너무 틀린 거로 각인 뿌리 체질되어 있어 문제인 것이다. 심하게 말하면 사단이 각인시켜 놓은 것이다.

이스라엘의 400년 노예 근성을 누가 심어놓은 것인가? 불평, 원망, 불신앙, 이게 단순한 상처가 아니다(고전10:9)

한쪽으로는 너무 세상 기준으로 각인되어 있고(물질주의, 성공주의), 다른 쪽으로는 내 기준, 필요, 욕심에 잡혔다.

날 인정해주지 않고, 내 필요를 채워주지 않는다는 것이다(딤후4:3) 그래서 모든 관계가 무너진다.

복음 안에서 구원받은 우리 인생의 결론은 분명하다. 하나님은 모든 사단, 저주, 운명, 지옥까지 끝내셨다.

이제는 흔들리고 불평하고 시험 들며 살면 안 된다. 모든 것을 누려야 한다. 문제도 누리라. 그래야 흑암이 꺽인다.

그 중에 정말 누려야 할 축복이 뭐냐? 만남의 축복이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누림이다.

이것을 복음 안에서 새롭게 해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제목이 “나의 만남이 새롭게”이다. 세가지 만남이 있다.

 

1. 일단 기본적인 것이 있다. 모든 만남을 축복이 되게 해야 한다.

가까운 만남들이 있다. 그것 때문에 행복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힘이 되기도 하고, 낙심되기도 한다.

1) 부부를 포함한 가족 관계다. 가장 가깝게 서로를 도울 수 있는 관계로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다(전9:9)    

부부 관계나 가족 관계를 소중히 여기지 못하고 거리 두고, 상처로 살면서 다른 데서(교회) 힘을 얻으려고 한다.

불신자 가족이라도 그들이 나를 인정할 수 밖에 없도록 섬기고 도와주라. 돈으로 하는 것 아니다.

정말로 기도하면서 마음이 전달되게 하라. 작은 것도 도울 수 있는 길을 찾아서 해보라. 가족복음화의 키다.

어떤 부부는 중직자이면서도 너무 육신적으로 잘 맞고 의지해서 아나니아 삽비라(행5장)처럼 되는 가족도 있다.

이익 문제나 갈등 앞에서 하나님 뜻을 선택할 수 있도록 도울 정도 되어야 한다. 평상시 영적 상태가 중요하다.

2) 학교나 직장, 사업체에서의 세상 사람들과의 만남이다.

물론 그들은 나를 지켜 볼 것이다. 내가 믿을 만한 사람인지, 책임감 있고, 희생하는 사람인지를 본다. 그렇게     지켜보다가 전도의 큰 문이 될 것이다. 노예 요셉을 주인이 인정하고, 감옥의 간수에게 사랑을 받을 정도였다.

자기는 안 믿으면서 믿을 사람을 연결해주기도 한다. 혹시 안 믿더라도 불신자가 나의 중요한 인생 시스템이       되게 만들어야 한다(대학을 가거나 더 좋은 직장을 얻어야 할 때, 위기를 당했을 때도 추천서가 중요하다)

바울은 자기가 만난 모든 사람, 특히 교회의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나의 추천서라고 했다(고후3:1-2)

 

2. 나를 어렵게 하는 사람들과의 만남이다. 쓴뿌리 같은 사람, 핍박자도 있고, 십자가 같은 사람(마16:24)도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성령의 능력으로 뛰어넘는 정도가 아니라 이것도 축복이 되게 만들어야 한다.

1) 악한 도구로 쓰여지는 사람들이 있다. 그 자신은 슬픈 일이고, 비참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이고(잠16:4), 내게는 축복이 되게 만들어야 한다.

다윗을 그렇게 죽이려고 했던 사울 왕, 결국 비참하게 죽는다. 그러나 다윗은 거기서 왕의 훈련을 받은 것이다.     그 아픈 시간에 하나님만 나의 오직이 되게 만들었고(시62:1-2), 모든 것을 수용할 리더의 그릇을 만든 것이다.

유다는 나지 않으면 좋을 뻔 했다고 했다(막14:21).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의 역사를 이룬 것이다(요13:31)

2) 잠시 못 깨달아서 실패하고 악한 일에 쓰여졌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이 중요하게 쓰실 사람들이 있다.

악한 일을 위해 쓰여지는 사람은 불쌍히 여기는 기도를 해야 하지만 이런 사람은 미래를 보며 기도하는 것이다.

핍박자 사울이 왜 다메섹에서 뒤집어졌을까? 거기에 사울을 바울로 세울 아나니아가 있었기 때문이다.

복음의 눈으로 사람을 보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그들이 하나님 앞에 쓰여지도록 도울 수 있는 제자였다.

주인의 집에서 도둑질을 하고 감옥에 간 오네시모가 주의 종이 된다. 그가 감옥에서 바울을 만난 것이다.        바울이 감옥에서 이 오네시모를 만나 복음을 주고, 그 주인인 빌레몬을 설득하면서 제자로 양육한 것이다.

사람의 당장을 보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도와보라. 그러다 바울, 오네시모 같은 제자도 서는 것이다.

 

3. 반드시 누려야 할 결론적 사람들과의 만남이다.

하나님의 절대 목표요 우리의 천명인 세계복음화을 위해서 평생 같이 가야 할 제자와의 만남이다(마28:19)

1) 그 제자들이 내 인생 속에 함께 가는 팀이 될 때 절대적인 응답이 시작되는 것이다.

예수님에게도 그런 팀이 있었고(12사도와 70인), 베드로에게도(다비다), 바울에게도 그런 팀이 있었다(롬16장).

2) 이 평생의 팀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는가? 그 축복으로 세상을 바꾸고, 평생의 축복을 같이 누리다 가는 것이다.

불신자도 내가 누구와 팀이 되어 있으며, 어떤 사람들과 같이 가느냐가 모든 것을 좌우한다(성공자의 특징)

팀은 질서는 있으나 상하 권력 관계가 아니다. 누가 제일 높으냐, 힘이 있냐는 팀이 아니고, 권력 관계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발을 닦아주고, 너희도 서로의 발을 씻어주라고 한 이유가 그것이다(요13:5-15)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고 원망하고 시험 드는 사람은 교인이지 제자는 아니다. 이런 사람은 찾아서 도와야 한다.

어느날 이제는 내가 도울 일이 뭔가를 생각하는 사람은 팀이 될 수 있다. 그런 사람이 중직자요 제자다.

3) 팀의 축복을 누리려면 내 자신이 먼저 주님을 따라가는 제자가 되라. 제자는 세가지 특징이 있다(마16:24-25)

“자기를 부인하라”고 했다.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내 기준, 내 주장, 내 핑계가 없다(믿음의 역사)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했다. 아버지가 원하시는 뜻을 따라 희생할 준비가 된 사람이다(사랑의 수고).

왜 십자가라는 표현을 했냐? 내가 원하지 않지만 아버지의 뜻이라면 따르겠다는 결단을 의미한다(마26:39)

그 일이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처럼 자존심 상하고 희생이 따르는 정도 아니다. 생명을 걸어야 할 수도 있다.

“나를 쫒으라”고 했다. 주님을 바라보면서 끝까지 가는 사람이다(소망의 인내)

대부분 주님 따라가지 않는다. 자기 이익과 필요를 따라 간다. 그러다가 팀의 축복을 놓치고, 자기 길을 간다.

유다도 자기 길을 간 것이고, 바나바도 자기 길을 간 것이고(행15:39), 데마도 자기 길을 간 것이다(딤후4:10).

 

결론-올해 최고의 제자의 만남과 팀의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 그 축복을 위해 나 자신부터 준비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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